<격통의 밤>
누구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다그쳐진 탄식'으로 애절하게 간구했던 시간들이 있다. 지금도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상실감으로 불면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오열하고 밤이 새도록 흐느껴도 괴로움이 사라질 줄 모른다. 얍복강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의 혈투 벌인 야곱 같고, 땀이 피방울이 될 정도의 목숨을 건 겟세마네 예수의 기도 같다.
<유기 불안>
‘밤에 부르던 노래’는 지나간 세월의 비참으로 채워진, 구슬픈 눈물의 노래다. 버림받은 자의 침울의 심각한 운조(韻調)이자 버림 당해 밟혀 본 자(민족)의 기억하기 싫으나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몸에 새겨진 곡조(曲調)다.
부모는 나를 버릴 수 있다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수 있다니, 언약적 신실함의 관계가 끝날 수 있을까?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나를 향한 ‘헤세드의 추격’을 멈추셨단 말인가?
<회상의 힘>
기억할 수 있는 여력은 평소 묵상하는 삶에서 온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 즐거움을 맛보아 체득한 자는, 기나긴 곤경과 풀리지 않는 현실의 악과 고난 앞에서, 여전히 살아 맴도는 헤세드의 만질만한 틈, 에메트의 생생한 기록을 소환한다.
비록 작은 소리로 되뇌여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해도(12절), 하나님의 세상 운행의 방식(道)은 드러난다. '정제된 과거'는 기억을 통해 지금 여기서 새롭게 살아난다.
<바다 속에 난 길>
하나님은 ‘모두를 위해 한번에’(once for all, 영단번에) 눌린 자, 배제를 겪어 본 자, 혐오의 참혹함을 아는 자를 위해 자유의 노래를 주셨다.
‘이제 그만’하라는 새로운 명령이 울려 퍼지고 해방을 위한 행진이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두려운 철벽은 천사도 알기 어려운 신적 모략을 통해 바뀔 수 있다.
<성찬, 먼저 온 미래>
몸에 대한 '잔인한 강탈'에 저항하려는 발판의 시작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개념을 제대로 숙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활을 미리 받은 몸은 ‘서로를 향한 소속감’으로 충만하여 나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복음의 사회를 펼치려 한다.
성찬은 부활한 삶을 지향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식탁이다. '새로운 기대'의 식사 자리는 새로운 경제적 상상을 불러온다.
성찬에서 빵이 찢어질 때 ‘찢어진 모든 이들과 생명의 선물을 함께 나누려는 강철 기대로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