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재는 고난이다(18, 20, 22)
삶은 고해(苦海)와 같다.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고, 복(福)보다는 화(禍)가 더 많은 것 같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허무한 쪽으로 기운다.
피조물들이 서로를 보면서 탄식하며(산고의 통증 수준으로)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 주위를 돌아봐도 아픔이 많고 비보(悲報)도 끝이 없다.
개인사를 봐도 막막하고 한숨이 나온다. 가족사는 더 복잡하다. 민족사는 풀지 못한 원한이 해원(解冤) 기다린다. 우리가 겪고 온 길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의 촘촘한 사슬이다.
고난과 고통의 원인은 너무 많아서 한 두가지로 규명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나와 가족 및 공동체(교회와 사회)를 고난에서 지킬 수 있거나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욥과 전도서의 저자들처럼 고난과 고통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살핌이 있어야 한다.
죄는 무지와 어리석음이다. 무지는 하나님을 아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남을 알아차리고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사회의 상태를 아는 일(물정物情)에도 구멍이 뚫린 것이다.
어리석음은 욕심을 내려놓지 않는 습성이고, 과욕으로 이웃을 헤치려는 마음이다. 자신을 상대화 할 줄 모르는 상태다.
2. 상실(썩어짐)에서 자유로(21)
물리적인 시간을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인간이나 동식물 및 자연계는 순환과 생성이든 상실과 후패(朽敗)이든 죄다 쇠락을 거듭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인간사회를 인간의 욕심이 움직이는 본성대로 내버려두면 정글과 같은 승자독식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런 상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낳는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욕심의 본성)로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모두가 상실과 썩어짐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출애굽)는 것이다. 구원은 자녀(아들됨)의 영광스러운 자유권을 갖게 한다.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지 않는다. 사랑의 하나님 나라에 복무(헌신)하는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사회와 교회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
너와 내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동등한 자유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3. 열렬한 기대(23-25)
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하나님 나라(통치)가 100% 임하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깊은 고뇌와 산통(産痛)을 통해 아들됨(자녀의 권세)을 마음껏 누릴 뿐 아니라, 몸까지 완전하게 회복(속량)되는 새 시대의 도래를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열망과 애절한 기대는 인간과 모든 피조물까지 구원 받을 수 있게 했다. 바울이 18절에서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이란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장차의 영광’이 전진해 온다는 믿음이다.
'장차의 영광'을 터득해 가는 신앙이라면 현재의 여러 난관을 여러 모습으로 응대(應對)하며 살아가도록 돕는다.
세상을 다스리는 웅장하고 거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인간 뿐 아니라 만물조차도 그분의 다시 오심을 학수고대 하며 격정적으로 우짖고 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 구원의 파노라마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이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는 교회가 '무한 인내'를 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된다.
5년 전에 성탄을 묵상하며 지었던 시로 복된 예수의 성탄을 축하하고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마굿간, 나귀 새끼>
주변부는 관심 밖,
누추한 곳도 불편 가득
찾는 이 그리 없네
변방서 왕이 올리 만무
권세 벗은 작은 나귀에 몸 싣고
희년 가무(歌舞) 덩더꿍 입성
오신 날 하늘, 별
숨 조린 기대,
멀리서 깊게 개벽 세상 동트나
맑은 슬픔으로 응시하며,
오실 날 우리,
땅의 여백 하늘 되어
드뎌 사랑 나라 차올라
애끓던 기쁨 멈춰 더 흐른다.
(2017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