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죽음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미움은 배제와 무시와 혐오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살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죽음을 이기려면(극복하려면) 목숨(생명) 지불이 필요하다. 사망의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무력화하려면 목숨 값을 내야한다.
개인/가족사와 국가의 역사는 피아(彼我)를 나누는 정복과 파괴의 연속된 사시(死時)였다.
<신앙의 진정성>
사랑의 행위는 몸으로 표현하는(나타나는) 것이며, 소유한 돈을 나누고 베푼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의 어려움을 계속해서 보고도 회피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된다(17절).
이제는 종교적인 말에 귀를 기울였던 시대가 지났다. 세상은(교회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내고 밥을 사며 필요를 채우려는 교회의 실질 행동에 감동하고 반응할 것이다.
<돌봄의 창조적 상상력>
코로나는 기후 재앙(위기)이 우리 삶으로 밀착해 왔음을 보여주었다. 기후 위기(재앙)뿐 아니라 돌봄의 위기도 확산되었다.
서로는(보이지 않는 박테리아까지도) '연결된 존재'인데 코로나로 인한 단절(거리두기)은 돌봄 마저도 양극화와 불평등 사회의 속살을 드러냈다(최근 세 모녀의 죽음과 자살을 보라)
우리는 서로가 돌봄의 주체로서 만나려면 각자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 받아야 한다. 선택의 자율성과 자기 삶의 통제권도 존중받아야 한다.
<삼삼오오 돌봄>
사람이 되기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른 돌봄을 부른다.
삽겹줄의 결속력처럼 상호 동등권을 실험하고 돌봄의 상상력으로 연령별, 장애별 각양각생의 돌봄도 필요하다.
실현되어가는 평등적 관계(공동체)를 희망의 중얼거림으로 파다 보면, 뭔가 나올 것을 고대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몸으로' 사랑하고 섬기다 보면 생각과 말이 바뀐다.
<새 계명의 완성>
서로 사랑은 서로 돌보며 서로의 연결됨을 맛보게 해 준다. 교회는 본보기(시범)를 통해 세상이 돌봄의 평등한 시공(時空) 되기까지 조급해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읊조린다.
'계속 파다 보면' 노다지나 산삼이 나오는 법이다. 우리 시대는 '자본의 속도'에 짓눌려 있다.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는 자멸적 시스템이 분명하다.
돌봄은 공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중요한 비밀 병기다. 사랑의 나라는 자본에 감염된 인간 너머로 오고 있다.
모든 완전한 선물과 은혜을 내려주시는 주께서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시며,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애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주셨고, 우리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모든 잘못과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심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