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4일 서향교회 주일설교
가족, 그 애증의 승화
(창 43:16-34)
<생존과 신실함 사이>
요셉의 꿈은 형들에 대한 다스림과 애굽에 대한 다스림이다. 창세기 42-44장은 가족들에 대한 다스림이다. 그래서 42-44장의 이야기는 관계적이고 심리적이다.
42-44장에서 요셉은 무정하고 계산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보인다. 기근이라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있고 가족에 얽힌 복잡한(꼬인) 관계는 신실함의 문제일 뿐 아니라, '받아들여져야 할 미래'와도 관련된다.
제국 속에서 사는 자들에게는 '생존과 신실함'은 피할 수 없는 주제다.
<아픈 가족사>
형들은 죄와 근심에 쌓여있다(4:21; 44:16). 형들은 믿음(약속)을 가질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형들은 과거의 사건에 강력하게 묶여있다.
그래서 형들은 아버지와 베냐민에게 또다시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44:30-34).
꿈과 약속이 없을 때 과거에 매여 있게 된다.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지 못한다.
우리의 가족사는 어떠한가? 가족사에서 얽힌 것들로 인해 오늘과 내일이 보이지 않는가?
<꿈이 이루어질까?>
형들은 꿈과 약속을 잊었지만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꿈에 참여한다(창 42:6; 43:28; 44:14). 꿈은 실제로 이뤄진다. 미래는 생명을 향해 나가는 법이다.
형들은 두려움 속에 있고 꿈의 성취를 포착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형들의 인과응보적 생각 때문이다. 과거에 매여 약속의 오늘과 미래를 살지 못한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기근) 절망적인 현실을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을 도무지 믿지 못한다. 자신들이 행했던 일에 숙명적으로 결박되어 있다. 과거의 덫에 걸려 절망적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슬픔 너머로>
슬픔에 잠겨 있는 야곱은 베냐민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주는 슬픔으로 인해 새로운 행동을 하지 못한다. 슬픔에 빠진 자는 미래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힘이 어디서 났는지 신기하게도 야곱은 양식을 얻기 위해(생존 투쟁) 소중한 베냐민을 딸려 보내기로 결심한다.
야곱은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한다. 야곱은 용기를 갖고 슬픔과 상실의 순환을 깨려고 한다.
야곱은 새로움이 열릴 수 있도록 신실함(믿음)의 남은 카드를 쓰고 있다. 야곱은 충분히 슬퍼할 수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삶의 악순환을 깰 수 있다.
<미래를 선택함>
요셉은 공적인 위치 때문인지 무정해 보이지만 동생 베냐민을 위한 열정만큼은 남다르다. 베냐민이 살아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며, 동생을 보고 싶어한다. 요셉은 베냐민 때문에 ‘마음이 타는 듯함’을 느낀다(43:30). 요셉은 베냐민에게 눈에 띌 정도로 호의를 베푼다(43:34).
요셉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거 가족사의 얽힌 일로 형들에 대한 복수심과 원한에 빠져 있지 않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베냐민으로 옮겨가며 다음 세대를 희망하며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길을 기대한다.
<성찰과 실천을 위한 질문>
가족사에서 얽히고 설킨 난제들이 도무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도 요셉의 꿈처럼 격통과 원한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주는 통치 안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